2022. 4. 28. 22:24ㆍETC/에세이
어쩌다보니, 취업이 잘된다길래, 돈을 많이 번다길래 등등의 무책임한 계기 또한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개발자의 길로 들어설수 밖에 없었던 의지 또한 분명 존재했다. 언제나 의지는 있었다.
그러나 방법을 몰랐다.
그 방법이 개발인지조차 몰랐다.
어릴적부터 나는 조금 외로운 아이였다. 초등학교 2학년때 집에 컴퓨터가 생긴 뒤로, 내 인생은 자연스레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밖에서 친구들과 놀기보단 집에서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했다. 컴퓨터로 뭘 했냐고? 지금은 사라진 CD게임을 즐겨했다. 프린세스 메이커 1,2,3,4 시리즈를 섭렵했다. 소위 여성향이라고 불리는 '코코룩', '쿠키샵', 'LOVE', 남성향이라 할 수 있는 오픈마인드월드 게임사의 리플레이 시리즈 등등. 대체로 양육 및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겨했다. 몇몇 스탯들이 특정치 이상 채워지면 특정 엔딩을 달성하고, 어떤 대화 선택지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캐릭터와의 호감도가 상승 혹은 하락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결국 어떤 '분기점'을 의미했다.
서른, 0과 1 사이에서
나는 수많은 분기점을 겪은 사람이다. 인생은 그 분기점을 통해서 달라진다. 대학교 졸업 후 막연히 디자이너를 지망해서 디자인 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디자인에 소질이 없었다. 나보다 뛰어난 감각을 가진 친구들을 보면서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학교를 그만 둔 후 몇 년간 방황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그렇게 이십대를 지나왔다. 1년 반 동안 공무원 시험을 보고 떨어지면서, 공무원도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사람이 그리웠다. 그리고 무작정 T어플을 깔았다.
사람을 구경하고 싶었다. 사람과 대화하고 싶었다.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알던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플에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 만남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영상 디자인을 하는 친구와 멕시코 음식을 먹고 산책을 했다. 여행 작가가 되고 싶다는 친구와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금융권에 종사하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이런 저런 조언들을 해주었다. 자기 동생이 돈 못 버는 음악가라고 했다. 아마 그 때 내 처지가 자기 동생같아서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부트 캠프 알아요?
자신의 친구 중 미대를 중퇴하고 부트 캠프 수료 후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사례를 알려주었다. 그 순간, 대학생 때 컴퓨터공학과 수업을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대학교 4학년 때, 인공지능(AI)이라는 강의명에 흥미를 느껴 무작정 들은 수업이었다. 그 때는 AI가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도 않은 때였다. 그런데 재미있었다. 쿼리를 짜면서 컴퓨터와 상호작용하는 기분이 짜릿했다. 뛰어난 학점을 받은 것도 아닌데 곧바로 여름 계절학기로 C언어 수업을 들었다. 졸업에 필요한 학점도 아니었다. 그저 프로그래밍의 기초 중의 기초라는 언어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 때의 즐거움을 떠올리면서, 부트캠프에 지원해볼까? 생각했다. 될지 안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 다음의 선택은 아시는 바와 같다. 나는 부트캠프를 통해 본격적인 개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전의 행적들이 여러 측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인문학적 지식을 통해 사람들과 다방면으로 소통할 수 있었고 디자인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감각으로 UI 와이어프레임을 설계했다. (깔끔한 발표 PPT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덤이다.)
시험을 잘 못봐서 한 번의 기수 이동을 하는 실패(?)도 겪었지만 부트캠프 과정에서 만난 친구의 응원과 긍정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개발자들이 서로 개발 지식을 공유하고 다같이 성장하는 문화가 마음에 들었다. 스택오버플로우만 봐도 문제를 겪는 사람을 위해 여러 답변들이 달린다.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그렇게 한다. 오픈소스 문화를 이룩한 개발자들은 마음이 넓은 사람들 같았다. 그리고 좀 더 효율적인 코드를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은 진정 똑똑해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그리고 저는 올해 서른 하나가 되었습니다.
'ETC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My First Viewing in Ireland (1) | 2025.07.17 |
|---|---|
| 7개월차 프론트엔드 개발자 (1) | 2022.12.26 |
| 빠짐 없는 기록의 현장 (0) | 2022.11.28 |
| Code is Weird (0) | 2022.11.28 |
| 성장하는 개인, 성장하는 기업 (3) | 2022.07.24 |